2021. 10. 1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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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리>의 설정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이나(소설 속 뱀파이어를 뜻하는 단어)마다 5~7명 정도의 공생인을 갖고 살아가는데, 이나와 공생인은 굉장히 애착이 강한 관계로, 이나는 공생인들의 피를 빨아 식사를 하고, 공생인들은 이나에게 물리면서 쾌락을 얻는 동시에 신체 기능이 보다 활성화되어 건강과 더 긴 수명을 얻게 된다. 그렇지만 이나와 공생인들이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나와 인간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피를 빠는 행위자체가 굉장히 에로틱하게 묘사되지만 공생인들은 따로 인간과 결혼을 하기도 하고, 이나도 이나끼리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그러나 이나 사이의 결혼은 인간과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설정들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이나와 공생인의 관계가 일종의 사랑의 유토피아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1대1로 서로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닌 다자간의 애정관계를 형성한다면 한 사람이 평생 주고받는 사랑의 총합을 따졌을 때 훨씬 클 것이 아닌가? 물론 현실적인 실현가능성은 낮은 이야기이고, 나 역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뱀파이어와 인간의 관계로 사랑의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재미있었다. 

 

반면 이야기로써 <쇼리>의 매력은 조금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잃은 쇼리가 자신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초중반부까지는 흡입력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법정공방이 시작되는 중반 즈음부터는 이야기의 활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덧붙여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계속해서 이러저런 조각들을 그냥 떠올리게 되는 부분들이 매끄럽지 못한건 물론이고 작가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이나의 능력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타당하나 이야기의 매력은 떨어뜨리는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중반부 넘어가면서 오탈자도 있고, 번역의 질도 떨어졌다는 점이다. 결국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은 책이긴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정도의 소설은 아니었다. 내가 읽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첫 책인데 다음에는 대표작 <킨>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영 나쁘지도 않았다는 말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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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