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30. 21:44
반응형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재미없게 읽은 적은 없는 것 같다.

근데 희한하게 또렷하게 떠오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역시 없다. 

그나마 해변의 카프카의 몇몇 장면들.. 

하루키의 소설과 산문들을 적지않게 읽었는데도 그렇다는건 참 신기한 일이다. 

어찌보면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이 좋은 이유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상실의 시대 역시 예전에 읽은 적이 있었고, 

조금도 어떤 내용인지 기억 나지 않는 소설이었다. 

보통은 줄거리가 조금은 기억이 나야 정상일텐데 참 신기하다. 


이번에 다시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느낀건 이건 스무 살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등장인물이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는 순간을 그렸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10대와는 다른, 새롭게 정신적으로 성장해나가면서도 아직 부족할 수밖에 없는 스무 살을 정말 잘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스무 살 시절은 이미 오랜 과거가 되었지만

사실 나의 정신연령이 스무 살이라고 생각해본적은 한 번도 없다. 

항상 10대의 어느 지점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딱히 싫지도 않았다. 

내가 인지하고 있다면 철없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느낌? 

굳이 철들기 위해 애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정신연령이 20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생 10대에 머물러 살 줄 알았는데 

조금씩은 크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덩달아..

나이보다 딱 10년만 천천히 크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도 이런 생각을 계속 한다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런것도 다 성장의 과정이 아니겠나..싶다

올길 부분은 이 소설의 끝 부분에서 조금


 가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익혔다. 혹은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진리였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 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많이 생각났다. 

두 소설은 정말 닮은 점이 많았는데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소설의 구성이 정말 많은 부분들이 닮아 있었다. 


가장 첫 번째는 시간 순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남녀가 함께 있는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두 남녀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점이 흡사하다. 

두 번째는 10대 남자 소년이 주인공이고 소년에게는 친화력 대장인 절친한 형이 있다. 

세 번째는 음악이 자주 등장한다. 뭐.. 하루키와 박민규 두 분 다 음악을 자주 삽입하는 작가이므로 조금은 억지라면 억지일 수 있겠다. 


박민규 작가가 레퍼런스로 삼은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건지가 궁금하다. 

상실의 시대 작품 속에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등장히기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을 다시 읽다가 많은 모티브를 얻으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실의 시대
국내도서
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 유유정역
출판 : 문학사상 2000.10.02
상세보기


반응형
Posted by O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