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우리 가족은 공원을 찾았다. 연이은 장마가 끝난 직후라 7월임에도 날씨는 생각보다 선선했다.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야외활동하기 좋은 날씨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 춥다고 느낄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공원에는 뽀로로 도서관이 있었다. 건물 바깥쪽에는 조그마한 뽀로로 조형물이 있고, 건물 안에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 구비되어 있는 도서관이 있었다. 물론 내부 인테리어는 모두 뽀로로 캐릭터여서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30개월을 갓 넘긴 조카아이는 또래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뽀로로를 무척 좋아한다. 나도 어릴 때 만화를 보고 자라고, 청소년 시기에 아이돌을 좋아했으며, 성인이 된 지금도 수많은 배우들과 작가들을 좋아하지만 아이들이 뽀로로를 대하는 것만큼 무언가를 좋아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뽀로로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면 흡사 첫사랑에 빠진 연인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무 살의 사랑은 스무 살만 할 수 있듯이 뽀로로와의 불같은 사랑이 가능한 시기도 지금뿐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조카는 이 공원에 처음 와본 건 아니라고 했다. 전에도 몇 번 왔었고, 뽀로로 조형물을 보고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특이하게도 조카 스스로 건물 안쪽 도서관까지 들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워낙 활동적인 아이라 책 같은 건 별로 관심이 없지만 아마도 건물 안에도 뽀로로와 관련된 무엇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결국 조카와 누나와 나, 세 사람은 신발을 벗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조카는 역시나 책에 관심이 없었다. 책은 보는 둥 마는 둥하고 도서관 내부를 계속 돌아다니기 바빴다. 어린이 도서관인 만큼 구조가 조금 독특했다. 일부가 복층으로 되어있었는데 그 부분이 조카의 흥미를 끈 거 같았다. 나는 조카가 이동할 때마다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지만 차마 허리를 굽히고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2층까지는 못 갔고(천장이 낮았다) 올라갈 때마다 금세 내려오길래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조카가 2층에서 내려오지 않고 머뭇머뭇 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2층에 힘들게 올라간다 한들 조카가 곧장 내려올게 뻔해서 안 올라갔던 건데 저렇게 심심해하니 한 번쯤은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가 내려가려는 찰나에 나는 몸을 숙이고 계단을 올랐고, 나를 본 조카는 환하게 웃으며 내려가려는 발걸음을 거둔 채 그대로 2층에 머물렀다. 조카는 누군가 올라오길 바랐던 것이다. 그 뒤로 특별한 걸 한 것은 아니다. 나랑 30초쯤 앉아있던 조카는 또 내려갔고 또 올라왔다. 책을 들고는 왔으나 읽지는 않았고 다행히 표정은 쭉 밝았다.
간단한 의사표시만 가능한 조카를 읽어내려면 표정과 몸짓이 중요하다. 그 덕분에 조카와 마주하는 시간들은 온전히 조카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이고(안전 탓도 있겠지만), 조카의 속마음을 읽어냈을 때의 기분은 힘든 만큼 짜릿함도 있다.
이에 비해 말로 하는 의사소통은 그만큼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여전히 몸짓과 표정은 일정 비중을 차지하지만, 대부분의 정보들은 말에서 나온다. 전화나 모바일 메신저같이 바디랭귀지가 0%인 매체가 널리 이용되는 것만 봐도 우리가 사는 이곳은 말로 소통하는 사회가 분명해 보인다.
조카와의 시간들이 유독 즐거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카와 내가 말로 소통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다. 모바일 메신저로 약속을 잡고, 만나서도 액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은 사람에게선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다. 아이와의 의사소통 경험을 어른과의 경험에 비교하는 게 적절치 않은 부분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서로 의사소통이 완전치 않을 때 눈 맞는 국제 커플들을 우리는 숱하게 보지 않았는가.
때로는 장애물이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직접 전할 수 없는, 편지만이 가능한 말들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때로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해야 할 말들도 있는 법이다. 그것은 꼭 고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소하더라도 서로를 바라보며 하는 대화가 조금 더 늘어나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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