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5.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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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본적으로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한국에 사는 내가 일본 문화를 많이 접했고,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본 수많은 일본 영화와 일본 작가의 책들을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나는 일본 문화를 선호한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곰곰히 돌이켜보면 내가 일본 문화에서 얻길 바라는 것은 삶의 여유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일본인들이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내가 좋아했던 일본 작품들 중 상당수는 독자(혹은 관객)로 하여금 여유를 갖게끔 만드는 작품이었다.

 

물론 수많은 일본 작품 중 내가 보고싶은 것만 골라서 보기 때문에

그냥 니가 그런것만 봐놓고 일반화 하는거 아니냐

라고 말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비슷한 감성을 가진 작품을 한국에서 찾기 쉽지않은 걸 보면

일본 특유의 감성이 있다는 나의 주장도 어느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나의 취향이 발동되어서인지 어째서인지

얼마 전 도서관에서 일본 작가의 에세이 3권을 동시에 빌리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에게 책 3권을 한번에 대출한다는 것은

'빌려는 가지만 반납기한 안에 다 읽을 마음은 없어요'

라는 것과 비슷하지만

어쩐지 3권의 책 중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빌리지 않으면 까먹고 영영 빌리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가벼운 에세이들인데 이정도라면 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 일단 3권의 책을 모두 품에 안고 돌아왔다.

 



첫번째 책은 쿠스미 마사유키의 '낮의 목욕탕과 술'이라는 책이다. 일명 낮탕술.

고독한 미식가라는 일드를 본 사람이라면 쿠스미라는 이름이 아마도 익숙할 것이다.

책의 저자가 바로 고독한 미식가의 작가로서

고독한 미식가 본편이 끝나고 끝에 불쑥 쿠스미라는 코너를 진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쑥 쿠스미 코너는 4~5분 남짓한 짤막한 코너이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해맑게 웃으며 (대개 낮술과 함께) 음식을 먹는 쿠스미씨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묘한 코너이다.

 

고독한 미식가는 앞서 내가 얘기했던 일본감성의 절정이라 칭할 수 있는 작품으로써

그런 작품의 원작자가 쓴 에세이집이라면..

나로썬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책인 것이다.

거기다 쿠스미씨가 얘기하는 낮술이라니 이거 반칙이라고 할 정도로 매력적이잖아...

(왠지 일본 작가들의 책을 다루다보니 이런 말투를 써야할 거같은 느낌,,)

 

낮탕술은 기본적으로 기행문의 형태를 띈다.

쿠스미씨가 열군데의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근처 가게에서 술을 한잔하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기본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어딘가 방문하고 그 후 식사를 하러 간다는 점에서

고독한 미식가와 비슷한 포맷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기행문의 형태라고 해서 실질적으로 여행을 유도한다거나 여행에 도움을 주는 글들은 아니다.

단지 낮의 목욕탕과 술을 예찬하고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눌수 있기를 바라는 글들이다.

그래서 20개의 글(10x목욕탕,가게)들은 정말 가게를 평가하고 분석하는 글들도 있지만

뜬금없이 다른 주제로 넘어가 사실상 가게 이야기는 거의 하지않는 글도 있고

실없는 농담으로 독자를 낄낄거리게 만들기도 하는 등 상당히 자유롭게 쓰여있다.

 

무언가 엄청난걸 기대하고 책을 든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엄청난 걸 만들고 싶은 사람이 낮에 목욕탕을 갔다가 술을 마실리가 없잖아.

낮탕술이라는 주제가 이렇게 자유롭지 않다면 오히려 그 쪽이 더욱 곤란할 것이다.

 

낮탕술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아무래도 서문이었는데

읽자마자 역시 쿠스미상이야!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좋은 서문이었다.

여기엔 낮술에 관한 부분만 살짝..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을 때 마시는 술은 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밤보다는 몸이 팔팔하기 때문이겠지.

몸도 마음도 원하는, 말하자면 승리의 나발을 부는 술이다.

사람들이 한창 일하는 시간에 마시니 어쩐지 겸연쩍기도 한데, 그런 느낌이 술을 더 맛있게 한다.

아직 할 일이 남았건만 그걸 무시하고 밝은 햇살 아래서 당당히 마셔버리는, 나더러 뭘 어쩌란말이냐는 식의 통쾌한 기분도 술맛을 돋운다.

마셔도 아직 '오늘'이 남아있다는 시간적 여유로움도 술맛을 풍성하게 한다. 말 그대로 밝은 술이다. 마시고 싶으니까 마신다. 그러니 취기도 명쾌하다. 기분좋다.

한 낮의 술은 어디를 어떻게 뜯어보아도 최고다.

그리고 술에 넘어가기 전에, 술에 무릎을 꿇기 전에 거침없이 돌아가는 것이 이상적이긴 한데, .

(후략)

 

낮의 목욕탕과 술
국내도서
저자 : 구스미 마사유키 / 양억관역
출판 : 지식여행 201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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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책은 기타노 다케시의 죽기 위해 사는 법이라는 책이다.

예전에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라는 책을 읽고 블로그에 포스팅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독특한 철학이 인상적이어서 다른 책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에 빌리게 되었다.

 

'죽기 위해 사는 법'은 기타노 다케시가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쳤을 당시에 썼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거기다 따로 일본 사회에 대하여 쓴 글 몇 편이 수록되어있는데,

아무래도 20여년 전에 쓴 글이다보니 공감이 되면서도 조금은 갸웃하는 부분도 많았다.

그 중에서는 최근의 상황에서는 꺼내기 상당히 껄끄러운 발언들도 있었는데(여성 문제)

애초에 그런걸 신경쓰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도 그런 류의 발언을 하는지, 여전히 그 생각엔 변함없는 지가 궁금해졌다.

 

그런걸보면 20년이 지난 지금 이 글들을 읽는건 조금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이 글들을 굳이 한국에 번역까지 해서 출판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점.

 

사실 책의 표지와 디자인도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죽기 위해 사는 법'이라는 책의 제목은 기타노 다케시의 철학을 상당히 압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지만

표지의 홍보 문구라던지, 본문 내용 중 출판사 마음대로 빨간 줄로 하이라이트 효과를 넣는다는지 하는 부분은

너무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그런 자기계발서와 전혀 차별화되지않는 나쁜 선택.

 

그런데 실은 책 내용도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저그런 자기계발서같은 책인걸까..)

역시 기타노 다케시 다운 생각이야!

라는 부분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나에겐 덜 흥미롭게 느껴졌다.

 

죽기 위해 사는 법
국내도서
저자 : 기타노 다케시 / 양수현역
출판 : 씨네21 200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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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은 가쿠다 미쓰요의 잘먹겠습니다이다.

사실 가쿠다 미쓰요라는 작가가 누군지 알고 책을 빌린 것은 아니다.

표지를 보니 일본 소설가라는 것은 알 수 있었고,

목차를 보니 음식 재료에 관한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지만, 책은 재밌어보였다. 그걸로 끝. 그냥 책을 빌렸다.

이 분이 종이달의 작가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책을 거의 다 읽을 때 쯤이었다..;

(어차피 종이달도 소설은 읽지않았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음식 재료를 소재로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어느정도는 쉬운 일이 아닐까 싶다.

요리를 하든 안하든, 미식가이든 아니든 기본적으로 하루 세 끼를 먹다보면 요리에 관한 추억이란 쌓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재료의 수가 40가지가 넘어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10가지만 넘어가도 소재 부족에 허덕이지 않을까 싶은데

가쿠다 미쓰요씨는 이렇게 많은 재료를 말하면서도 지치는 기색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런 류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부분만 재밌고 갈수록 퀄리티가 떨어지는 느낌은 전혀 없다.

글이 재미도 있지만 품질의 편차가 매우 낮다. 꾸준히 이어지는 양질의 글.

그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가쿠다 미쓰요 씨의 음식 일대기도 굉장히 파란만장하다.

편식이 자유로운 가정에서 생활하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편식을 고치고 다양한 재료의 맛을 느끼게 되었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음식 만화의 주인공같은 비범한 스토리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런 탓인지, 그녀의 글을 생생하다.

누가 각종 재료를 처음 맛봤을 때를 그녀만큼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장점은 편식을 극복하는 성장 스토리를 쓰다보니

실제로 그 재료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공감할 수 있는 글이 되어버린다.

더불어 편식하는 입장에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음식을 먹으면

나도 미쓰요씨처럼 재료의 맛을 깨달을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든다고 할까..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밥을 챙겨먹듯이 아주 소소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긴다던지, 깊은 감명을 받는다던지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작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이 책을 읽었을 거라 나는 확신한다.

(심지어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 있다.)

 

우리가 읽는 수많은 에세이들은 시간이 흘러 6개월만 지나도 우리의 뇌에서 잊혀질 것이다.

그렇지만 에세이를 읽는 순간, 그리고 에세이가 우리의 생활과 만나는 순간 느끼는 행복감은

왜 우리가 잊어버리면서도 계속 독서를 하는 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것이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국내도서
저자 : 가쿠타 미츠요 / 염혜은역
출판 : 디자인하우스 201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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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