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은 빈약한 애플 tv 라인업의 대표작 중 하나인 <테드 래소>. 아마추어 미식축구 감독인 테드 래소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축구리그 감독이 된다는 황당무계한 스토리이다. 이러한 설정에는 아마추어↔프로, 미식축구↔축구라는 대립항이 있어서 그런 듯한데 아쉽게도 작품 속에서 이 특징이 두드러지게 살아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을 장르적으로 분류하자면 맨 처음에는 시트콤을 떠올리게 되지만 볼수록 정극의 느낌이 강하다. 그러니까 굳이 정의하자면 코믹한 느낌이 가미된 스포츠 휴먼 드라마 정도의 괴랄한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유머는 굉장한 미국식 유머이고, 기본적인 문화이해도를 필요로 하는 개그가 많다. 철저히 캐릭터 중심으로 재밌는 상황을 만드는 우리나라 시트콤과 달리 제이슨 수데이키스의 개인 역량으로 승부를 보는 경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특이한 것은 주인공 테드 래소를 제외하고는 개그캐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시트콤으로 분류하기가 좀 애매해지는데 시트콤적인 연출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 더 정체성에 혼동이 온다.
웃음이라는 건 참 주관적이니까 뭐라고 평가하기가 애매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으로 평가해보자면 <테드 래소>의 개그 타율은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물론 내가 영미권 문화에 정통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제대로 이해한 것 중에서도 빵터진 개그는 거의 없었다. 잘해봐야 ㅎㅎㅎ 정도? ㅎㅎ. 말이 너무 길어졌는데 그러니깐 결론은 <테드 래소>는 코미디에 방점을 두고 보기엔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드라마로써 <테드 래소>를 살펴보자.
<테드 래소>를 시청하는 사람 중에 상당수는 epl 감독이라는 소재에 끌려서 이 작품을 골랐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축구와 EPL에 무례할만큼 좋지 못한 스포츠 드라마이다. 이 작품이 남발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설정들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오히려 더욱 많은 비현실적인 소재를 활용해서 재밌는 장면들을 만들어냈다면 이 작품을 높게 평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EPL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시놉시스와 홍보 문구에 EPL을 써서 전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게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굉장히 불순한 의도로 EPL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다. EPL을 소재로 삼고자했다면 축구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에피소드에 녹여내려는 고민의 흔적이 보여야 한다. 이 작품의 지향점이 웃음이든 감동이든 간에 축구 룰도 모르는 사람이 EPL 감독이 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해프닝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단순히 미식축구와의 용어 차이로 퉁 칠 부분이 아니고 EPL과 미국 프로 스포츠는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차이가 있고 아마추어 감독이 프로의 세계에 입문했을 때 느끼는 차이도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무궁무진한 소재가 있을만한 부분을 이 작품은 등한시했다. 스포츠 드라마로서의 발전방향에 대한 고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테드 래소가 감독 2년차에도 여전히 오프사이드 룰을 이해 못한다는 개그는 웃기기는커녕 축구에 대한 무례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축구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태도 이상의 문제를 야기하는데, 이 작품의 주요 무대가 AFC 리치먼드 풋볼 클럽 내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태생적으로 깊이있는 이야기를 가져가는데 많은 애로사항이 생기게 된다. 축구를 잘 알지도 못하고 축구에 대해 관심도 없는데 축구팀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잘 만든다는 것이 과연 쉬운일일까? 당연히 어렵다. 그러다보니 시즌 1에서는 굉장히 1차원적인 낙관주의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시즌 2에서는 테드 래소보다는 레베카&킬리의 이야기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진다. 이야기가 자꾸 축구장 바깥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특히 시즌 2에서 팀이 강등당했는데도 선수단 변화도 없고 새로운 선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진이 얼마나 게으르고 축구에 무관심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이다(이것은 절대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왜 수많은 드라마들이 어렵게 시청자에게 등장인물을 인지시켜 놓고 매 시즌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는 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앞선 문제점보다 더 심각한 것은 <테드 래소>가 캐릭터라이징이 대체로 부실하다는 점이다. 까놓고 말해서 테드 래소도 말재간 원툴이지 그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든지 이야기가 부실한 편이다. 시즌 1에서는 이혼이라는 설정을 꺼내더니 별다른 활용도 없이 흘려보내고 시즌 2에서는 느닷없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우리가 테드 래소가 앓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에 공감하기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테드 래소는 축구적인 지식도 없지만 그만의 철학으로 조직을 다루고 변화시키는 인물인데 늘상 구단주나 코치하고만 대화하지 선수들과 얘기하는 장면은 찾기가 힘들다. 그도 그럴것이 AFC 리치먼드 선수들의 등장빈도가 너무 낮다. 25명 남짓한 스쿼드 전체의 등장은 바라지도 않지만 시즌 2까지 했다면 적어도 주전급은 대강 눈에 익어야 할 것 아닌가? 선수들 이야기 만드는데 게으르다 보니 당연히 테드 래소 캐릭터도 복합적이지가 않다. 팀 운영은 코치들한테 다 맡겨놓고 구단주한테만 샤바샤바하는 팔자 좋은 감독이 이혼과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공황 장애 겪는 것을 이해하라고? 너무 이상한 이야기다. 공황장애라는 설정을 넣고 싶었으면 최소한의 사전 작업이 있었어야지 성적압박도 안 느끼는 설정이고 이혼의 아픔을 레베카와 어느정도 이겨내는 에피소드까지 넣어놓고 갑자기 공황장애라고? 갑자기 아버지와 관련된 트라우마로? 비슷한 맥락으로 테드 래소의 오른 팔인 비어드 코치 또한 자주 등장하지만 굉장히 표면적인 설정만 있을뿐 캐릭터라이징이 그다지 잘 되지 않았다. 비어드라는 캐릭터에 대해 우리는 너무 아는게 없는데 갑자기 시즌2 9화 같은 에피소드가 나오면 전혀 친하지 않고 별로 관심도 없던 사람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갈 수도 없고.. 거 참
그나마 캐릭터라이징이 된 인물을 꼽자면 레베카와 킬리 정도? 그치만 시즌 2에서 이들 비중이 너무 올라가버려서 이야기가 중심을 잃은 부분이 있다. 남성 중심의 서사를 경계한 부분이 있는 듯한데 그럴거면 여자 축구단 이야기를 하든지 여자 감독 이야기를 하든지.. 감독이 주인공인데 구단주와 마케터 이야기 비중이 높은 것도 이야기가 이상하잖아.
또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 건 앞에서도 말했듯 이 작품이 묘하게 시트콤에 발을 걸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다. 물론 '자주 웃기려고 시도하는 작품이니까 당연하지!' 하고 얘기한다면 그 말도 맞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은 점은 단순히 웃기는 것 외에 이야기 진행의 편의성을 위해 시트콤의 특성을 악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웃기기 위해 비현실적인 설정을 남발하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드라마를 만들 때마저 시트콤처럼 편의적인 설정을 남발한다. 시청자가 드라마에 몰입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깊이가 있어야하는데 <테드 래소>는 이를 지나치게 외면한다. 예를 들자면 시즌 2에서 다니 로하스의 입스에 대해서 다뤄지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입스는 굉장히 복합적이면서도 규명하기 어려운 병이다. 상담 한 번에 해결되는 문제가 전혀 아니다. 입스를 전문적으로 다뤄달라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다룰거라면 그냥 안다루느니만 못하다. 시즌2는 다니 로하스뿐만 아니라 많은 캐릭터의 정신적인 문제에 대한 에피소드가 이어지는데 하나같이 이런 식이다. 만약 입스가 웃긴 상황을 만들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누가 1번의 정신상담으로 입스가 해결된 것을 문제 삼겠는가.
<테드 래소> 같은 드라마를 까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비판받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선한 이야기가 좋을 때면 종종 이야기와 캐릭터뿐만 아니라 제작진의 선한 마음이 작품을 뚫고 나오는 경험을 하곤 한다. <테드 래소>는 좋은 클립도 여럿 있고, 선한 캐릭터들이 주를 이루고 언제인지 모르는 그 종착역도 좋은 결말일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테드 래소>의 제작진마저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작품의 제작진이 인물들을 대하는 방식은 굉장히 조악하고 조심성이 없다. 애정 또한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이야기 또한 섬세하지 못하고 투박하다. 애석하게도 나는 이 작품의 이야기와 캐릭터 어떤 것에도 따스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테드 래소>는 그냥 못 만든 드라마일 뿐이다. 이게 내가 이 드라마를 추천하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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